자유게시판

 

 

 
 

I D

 

PW

회원가입

아이디/비번찾기

 

      병휘이야기
      방송기사
      커뮤니티
      갤러리
      공지사항
      자유게시판
      회원자료실
      예매신청
      Friends

 

 

이   름     유득용(드꽁이)   [zsold2@chol.com]
제   목     에릭 클랩튼 Layla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





이 글은 제가 몇 년전에 모 음악동호회에 기고했던 글을 약간 손본 것입니다.

지난 2월 16일밤 병휘 형의 작업실에서 아름다운 시간을 가지면서

잠시 Layla에 대한 얘기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곳에 옮겨봅니다.

팝 음악에 관심 있는 분들께는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A Tribute to  Eric Clapton & Duane Allman ~~



Derek & the Dominos   -   Layla

 

 [Layla and Other Assorted Love Songs]  1970


 

   

▣   Eric Clapton   (1945 -   Ripley, England)  ▣

  

 

  

 

'Layla' 의 탄생 ... 그리고 뒷 이야기 

 

Duane Allman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우리 동호회 거의 대부분 회원분들이 지금 나오는 Eric Clapton의 'Layla' 라는 노래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약간의 팝 지식을 갖고 계신 분이라면 이 노래가 에릭 클랩튼이 Derek & the Dominos라는 그룹에 있을 때

발표한 노래이며, 절친한 친구였던 비틀즈 George Harrison의 아내 Patti Boyd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담은

노래라는 것까지도 잘 아실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그간 너무 많이 소개되어서, 어찌 보면

그 애절한 사랑 (혹은 뻔뻔한 불륜...) 이야기가 식상하게까지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동호회에서는 세간에 잘 알려진 이야기 말고 

'Layla'가 탄생하기까지 에릭 클랩튼의 음악적인 행보 - 특히 Duane Allman과의

관계와 상호교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안전벨트 매시고 1969년-1970년의 영국과 미국으로 시간여행을 떠나실 준비 되셨나요?

 

 


 

 


Derek & the Dominos 의 결성

 

 

많은 사람들이 블라인드 훼이스(Blind Faith)의 해산 원인을 딜레이니 앤 보니에게 돌린다. 하지만 딜레이니 앤 보니의

분열을 가져온 인물이 바로 에릭이었으니 이런 쪽으로 주판알을 튕겨 본다면 서로 밑질 것 없는 관계인 셈이다.

Eric Clapton은 Yardbirds(1964-66), Bluesbreakers (1966), Cream(1966-69), Blind Faith (1969) 같은

수퍼그룹들을 거치면서, 자신이 가진 블르스 기타리스트로서의 역량을 여러 형태로 마음껏 펼쳐보였다.

Blind Faith의 해산 원인이 되었던 Delaney and Bonnie (1969-70)에서의 활동은

이후 에릭 클랩튼의 음악 행보에 있어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에릭은 Delaney and Bonnie 밴드의 멤버들 - Bobby Whitlock (키보드,보컬), Carl Radle (베이스),

Jim Gordon (드럼)과 친교를 다졌다. 그들은 Leon Russell의 권유로 Delaney and Bonnie의 그늘을 떠나

Joe Cocker & Mad Dogs & English Men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에릭 클랩튼과 합치게 되었다.

 


 

 

미국이 좋아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에릭이었지만 타향에서의 오랜 체류기간은 향수병을 안겨주었고,

그는 새로운 뮤지션들과 함께 고국에 돌아왔다. 영국에 돌아온 그는 Blind Faith의 선전용 사진을 찍었던

Hardwood Edge에서 새 밴드의 연습을 시작했다. 정식 이름 없이 Eric Clapton & Friends로 통했던 이들은

1970년 6월 1일, 시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기금 마련 행사에서 데뷔를 장식하기 직전,

Del & the Dominos 로 밴드명을 정했고 나중에 다시 Derek & the Dominos로 변경하였다.

(에릭의 친한 친구들은 그를 '리키'라는 애칭으로 불렀지만, '델' 역시 오랫동안 불려진 닉네임이었습니다.)

에릭은 Delaney and Bonnie 이후 오래간만에 선 영국 무대에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고 턱수염도 깎아버린 그는 팬더 스트라토캐스터 일렉기타를 들고

'Crossroad'부터 솔로 앨범 수록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넘버들을 선보였고 관객들의 반응 역시

연주곡 못지 않게 가지각색이었다.

 

Disc and Music Echo 잡지는 "에릭 클랩튼 치고는 따분한 데뷔였다." 라는 기사를 실으며

신통치 않은 점수를 주었고 이에 동감을 표시하는 편지들이 독자 코너에 쏟아져 들어왔다.

끝까지 지켜볼 수가 없어 도중에 공연장을 나왔다고 투덜대는 팬도 있었으며, 알맹이인 연주보다

에릭 클랩튼이라는 이름에 무조건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염증을 느낀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뱉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부정적 견해와 상반되는 의견도 물론 있었다.

Derek & the Dominos에게 흥미를 느낀 관객들은 거침없이 긁어내리는 기타도,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노래도 모두 최상이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타인들의 말은 아무래도 좋았다. 무대에 선 당사자 에릭은 밴드의 음악에 만족했고

여유있게 웃으며 기타줄을 훑었다. 그가 무대에서 웃음띤 얼굴을 보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에릭의 집에 모여 호흡을 맞추던 밴드는 3주 예정의 클럽 순회공연에 나섰다.

소규모 순회공연에 앞서 에릭은 입장료를 1파운드 이하로 정할 것과, 관객 유치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내걸지 말 것 등의 단서를 달았다. Derek & the Dominos의 공연은 날이 갈수록 향상되었는데

특히 마키 클럽에서 가진 무대는 꽉 짜인 구성에 박진감과 흥분이 가득한 멋진 공연이었다.

이날 밴드는 Jimi Hendrix에게 바치는 곡으로 'Little wing'을 연주했는데

약 한 달 후인 1970년 9월 18일, 헨드릭스는 숙취로 인한 토제 흡입으로 사망했다.

 

 

위 사진처럼 타오르는 불꽃 같은 27년 인생을 살다 간 지미 헨드릭스.

1967년 Monterey 팝 페스티벌 공연 도중 자신의 기타에 불을 지르는 장면.

 


 

 

첫 앨범 녹음 전에 가진 마지막 콘서트는 버밍엄의 다운 홀에서 이루어졌다.

공연에 대한 평가는 데뷔 무대에서 쏟아진 혹평과는 상반되는 기대어린 글들이었다.

이 무대에서는 Led Zeppelin의 Robert Plant가 에릭과 노래하고 싶다면서

무대로 뛰어오르는 광경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그의 열정은 로드 매니저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그 멍청한 로드 매니저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요... 역사적인 두 사람의 잼 연주가 펼쳐지는 것을 막다니!!!)

 

 

당대 최고의 락 보컬리스트였던 Robert Plant.


 

 

 

 

 

'Layla'의 탄생

 


Derek & the Dominos는 음반 녹음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수록곡들은 1970년 초에 벌써 완성해 놓은 상태였고

프로듀서로는 George Harrison의 앨범 [All Things Must Pass]의 세션 때 만난 Phil Spector로 내정되었다.

(필 스펙터는 1960년대 수많은 팝그룹의 음반들을 프로듀스했죠. 비틀즈의 [Let It Be]를 포함해서요.)

밴드는 필 스펙터의 지휘 아래 'Tell the truth'를 녹음해 싱글로 낼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막상 완성하고 나니

그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곡 'After midnight / Easy now'로 대치하고 다른 프로듀서를 물색했다.

(데뷔앨범에 수록된 'Tell the truth'는 후에 다시 녹음된 곡이며, 필 스펙터가 프로듀스한 버전은

 [History of Eric Clapton]에 들어있습니다.)

 


프로듀서 문제로 고민하던 매니저 로버트 스틱우드는 Cream 시절부터 에릭과 일하기를 원하던

탐 다우트에게 연락을 취했다. 당시 탐은 마이애미의 한 스튜디오에서 Allman Brothers Band의 2번째 앨범

[Idlewild South]를 녹음하고 있었다. 스틱우드로부터 Derek & the Dominos의 새 앨범 의뢰를 받은 그는

반갑게 요청을 수락했으며 Allman Brothers Band의 기타리스트 Duane Allman에게 세션을 부탁했다.

그러나 듀앤 올맨은 단지 지켜보기만 하겠다며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듀앤 올맨은 이전에 캘리포니아에서 에릭 클랩튼의 연주를 본 이후 그의 팬이 되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이 두 사람은 서로의 팬으로서, 에릭 역시 Wilson Pickett과 Aretha Franklin 등의

세션에서 보여준 듀앤 올맨의 연주에 홀딱 반해 있었다.

 

 

 

연주에 몰입하고 있는 Duane Allman.


 

 


마이애미에 도착한 에릭은 Allman Brothers Band의 야외 콘서트 소식을 듣고 탐 다우트와 함께 공연장에 갔다.

긴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기타를 치는 듀앤 올맨은 무대 위에서 단연 돋보였다.

뼈에 가죽만 덧씌운 듯 깡마른 듀앤은 눈을 감고서 얼굴을 하늘로 쳐들고 마치 파도를 타듯 몸을 움직이며

자신 안에서 생성되는 음을 솔로로 펴나갔으며, 에릭은 무대 바로 앞 잔디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연주를 마친 듀앤은 눈을 뜨고 얼굴을 관객 쪽으로 돌렸는데 바로 앞쪽에서 말똥말똥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에릭을 발견하고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으며 공연이 끝난 뒤 탐 다우트에게 연주도 엉망이었는데

그를 데려왔다며 원망을 퍼부었다. 그러나 듀앤의 염려와는 달리 공연 내내 에릭은 어떻게 하면 저런 연주가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감탄에 감탄을 하면서 감상을 했다. 결국 듀앤은 Derek & the Dominos의 앨범에

참여하게 되었고 스튜디오에 나타난 그를, 에릭은 오랜 기간 헤어져 있던 친구를 대하듯 반가이 맞았다.

두 사람은 녹음실에서 나란히 앉아 기타 프레이즈를 교환하고, 아이디어에 대해 의논하고 음을 다듬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곡이 'Layla' 였다. 후에 언플러그드 버전으로 부활하여

다시 관심을 받기도 했던 이 곡은 잘 알려진대로 조지 해리슨의 부인 패티 보이드에 대한 연모의 노래이다.

 


영국에서 에릭 클랩튼의 이미지는 얌전하고 정적인 뮤지션으로 굳어져 있었는데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그의 여성 편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Yardbirds 시절의 에릭은 많은 여자들을 만났으며

언제나 데이트할 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학교에 다닐 때는 단지 여드름이 난 평범한 소년으로

항상 이성의 관심 밖에서 맴돌았으나 밴드에 들어가 무대에 서자 상황은 180도 뒤집혀

몇 천 명이나 되는 소녀들이 구세주를 부르듯 숨넘어가는 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치게 되었고

에릭은 그것이 바로 파워라고 실감했다. 밴드를 쫓아다니는 그루피들의 대부분은 보통 알려진 바와 같이

쭉쭉빵빵의 몸매를 지니고 있지만 머리 속은 텅텅 빈 여자들이다. 하지만 가끔씩 그런 선입견을 깨는

인물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에릭이 관심을 기울였던 여자는 지적인 매력을 풍기던 데본 이라는 흑인 미녀였다.

라스베가스를 주무대 삼아 활동하는 그녀는 Quincy Jones에 의해 발탁되어 그루피의 여왕 자리에 올랐으며

뉴욕의 클럽에서 에릭과 만났다. 당시 그녀는 헨드릭스와 에릭을 동시에 사귀며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는데

(정말 대단한 여자입니다. 일렉기타의 두 전설... 헨드릭스와 에릭을 양손에 놓고 주물렀다니!!)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소년의 이미지를 가진 에릭에게 조금 더 끌리는 상태였다. 하지만 에릭의 잦은 순회공연으로

데본과의 관계는 얼굴을 아는 친구 사이에서 진전되지 않았으며 빼어난 미모의 그늘에 심한 헤로인 중독이라는

어두운 면을 지니고 있던 그녀는 헨드릭스가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의 첼시 호텔에서 투신자살했다.

데본의 자살 원인은 많은 유명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故 George Harrison과 그의 아내 Patti Boyd.

 

 

 

Eric Clapton과 Patti Boyd.




에릭과 그의 오랜 친구인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의 관계는 비밀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공공연한 것이었다.

비틀즈가 균열 조짐을 보이던 1966년 후반,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은 인도의 종교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아내 패티도 그와 함께 인도 여행에 동참하고 요가 운동을 벌이는 등 남편 못지 않게 열의를 보였다.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반을 전후하여 서양에는 동양의 사상이나 패션, 차(茶) 등이 대단한 열풍을 일으켰고

에릭도 인도 종교에 빠져 당시의 감정을 'Presence of the Lord'에 담기도 했지만 조지 해리슨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신앙을 넘어 힌두 크리슈나 계몽운동을 축으로 삼아 모든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의 종교에 대한 탐구와 열의는

아내 패티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처음에는 함께 행동하던 그녀였지만 날이 갈수록 종교에 비중을 더해가는

조지의 태도에 불만을 느껴 이전부터 자신에게 연심을 표현하던 에릭에게 반응을 나타냈다.

하지만 사랑에 답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패티는 에릭에게 던졌던 호의들을 훌훌 거두고 다시 남편의 곁으로

돌아가고 말았고, 에릭은 이 상처를 'Layla'라는 불후의 명작으로 토해내었다.

에릭의 마음은 바다 속의 조개였고 'Layla'는 그 상처입은 조개에서 태어난 찬란한 진주였다.

('Layla'라는 제목은 에릭이 매우 좋아하던 페르시아의 사랑이야기에서 따온 것입니다.)

 

 

 

Eric Clapton과 Duane Allman의 협연 모습.


 

 

 

노래의 내용과는 또 다르게 음악적으로 얘기하자면,

'Layla'라는 딸의 아버지는 에릭 클랩튼이요, 어머니는 듀앤 올맨이었다.
듣는 순간 감상자를 확 가게 만드는 초반부의 오프닝 리프는 듀앤 올맨이 만든 것으로, 

Albert King의 'As the years go passing by' (1967)에서 얻은 영감을 빠르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뒤따라 터져나오는 밴드의 하드락적인 사운드, 그러한 고출력에서도 감미로움을 잃지 않는

에릭 (팬더 스트라토캐스터)과 듀앤 (깁슨 레스폴) 2대의 기타가 엮어내는 멜로디,

드러머 짐 고든이 솜씨를 보인 후반부의 피아노 콘첼토 등은 불후의 명곡이라는 수식어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 곡에서 듀앤과 에릭은 훌륭한 조화를 들려주고 있는데, 이러한 호흡은

헤로인 이라는 약물의 힘을 다소 빌린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인종 문제까지 거론되는 뮤지션들 사이에 있어

약물은 서로의 대화를 더욱 유연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다. 오래전부터 명작을 만들려면

보통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파격적인 (혹은 파멸로 치닫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고

많은 뮤지션들이 록큰롤적인 삶과 음악적 영감을 위해 약물을 사용했다. 하지만 에릭과 듀앤에게 있어

헤로인 사용 목적은 음악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공통되는 체험이 필요했고 그 방법으로 약을 했는데

결론을 말하자면 'Layla'에서 좋은 일치감을 얻긴 했지만 촉매제로 사용한 헤로인으로 인해

잃은 것 또한 만만치 않았다. (당연하지!)

 

 

 

Eric Clapton의 집에 놀러온 Duane Allman과 기념사진 한 방~ 찰칵!


 

 

 

 

 

'Layla' 탄생 이후...  에릭 클랩튼의 의욕 상실과 방황

 


1970년 8월에 녹음을 끝낸 에릭은 영국으로 돌아와 순회공연을 가진 뒤에 10월 중순부터 미국 순회공연에 나섰다.

공연을 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미국과 영국은 차이가 컸다. 클럽의 규모도 작고 음악지와의 연계도 좋은

영국에서의 공연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미국에서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Derek & the Dominos는 미국에서 무명이나 다름없었고 앨범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을 때였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수익이 높은 대규모 공연을 원했던 매니지먼트 측은

"에릭은 곧 에릭이다." 라는 선전용 뱃지까지 만들어 홍보용으로 돌렸다.

Derek & the Dominos가 미국 땅에서 가진 최초의 유명한 콘서트는 뉴욕 필모어 이스트에서 개최된 쇼였다.

이 공연을 본 관객들은 환호를 올렸지만 비평가들은 밴드의 특징이 잘 전달되지 못했다며 혹평을 했다.

매스컴의 혹평은 공연이 진행될수록 강도가 세지더니 로스앤젤레스에서 마지막 콘서트가 열릴 무렵에는

"신은 죽었는가?" 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기도 했다. (에릭의 별명이 '기타의 신'이었죠. 그 별명과 니체를 패러디한 제목)

 

Derek & the Dominos의 유일한 스튜디오 앨범 [Layla and Other Assorted Love Songs]는 1970년 11월에 발매되었다.

앨범 재킷에 쓰인 그림은 조르지오 고멜스키의 프랑스 저택에 걸려있던 것인데, 니스의 록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그의 집에 머물렀던 에릭의 눈에 들어 커버로 발탁되었다.

(이 그림에 대해 미국 레코드사는 별 불만이 없었으나 영국 폴리돌 사는 거부의 뜻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Derek & the Dominos 의 유일한 스튜디오 앨범 LP 앞면.

 

 

 

LP를 펼친 안쪽면의 사진.


 


 

 

 

Derek & the Dominos의 앨범은 콘서트와 마찬가지로 냉대를 받았고 상업적으로 참패를 하고 말았다.

2년 후인 1972년 6월, 이 음반에 수록되었던 'Layla'는 싱글로 제작되어 미국과 영국에서 대히트를 쳤고

10년 뒤 다시 재발매되었을 때도 폭발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하지만 정작 첫 발표 당시에는 날개 한 번 펴보지 못하고

죽어버렸으며, 이와 함께 에릭의 의욕 또한 사그라들었다. 모든 창작 작업의 필수 불가결 요소인 의욕이 소멸했으니

밴드에게 더 이상의 미래가 있을 리 만무했다. 에릭은 Derek & the Dominos가 2집 준비에 들어간 직후인

1971년 2월, 당분간 라이브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의 말이 시발점이 되어 멤버간의 갈등, 녹음 중지 등의 현상이

차례로 도미노(!)처럼 일어나 Derek & the Dominos는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은둔... 그리고 Rainbow Concert

 

 

1971년 그가 모습을 보인 공연은 8월에 열린 방글라데시 자선 콘서트와 12월의 레온 러셀 쇼였다.

조지 해리슨의 초대로 자선 무대에 선 그는 오후 공연에는 휀더 스트라토캐스터를, 야간 공연에는

깁슨 버드랜드를 사용했는데 헤로인의 금단 현상을 완화시켜주는 드롭프스를 복용하고 있었기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레온 러셀의 쇼에는 사전 출연 예고 없이 슬그머니 등장해

앰프 뒤에서 연주하고 조용히 사라졌다.

 

이후 2년간 에릭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 뮤직 비즈니스는 그에게 등을 돌렸고 마음을 준 사람들은

하나 둘 씩 저승행 열차를 탔다. 지미 헨드릭스가 세상을 뜬 이후 외할아버지가 중병을 앓다가 작고했고

1971년 10월 듀앤 올맨마저 오토바이 사고로 가고 말았다. 에릭은 호화로운 저택에서 여자친구 앨리스와

헤로인만을 벗삼아 지냈다. 약쟁이로 이름난 키스 리처즈나 브라이언 존스는 경찰의 눈을 신경써야 했지만

에릭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와 함께 지내던 앨리스의 부친이 상당한 권력가였기 때문에 에릭의 집은

언제나 수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이것이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하지만 그는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의 뒤를 이어 약물과 목숨을 바꾸지는 않았다.

헤로인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두렵게 생각하는 것은 약물중독보다는 사용을 중지한 뒤에 닥칠 금단현상인데

의학계 쪽의 소견을 들어보면 오히려 알콜중독의 치료가 더 힘들며 헤로인의 경우에는 돌봐줄 사람과

본인의 의지만 굳으면 예상보다 수월하게 끊을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주목받는 존재로 또 세계적인

뮤지션으로 부지런을 떨고 일했고, 이제야 비로소 쉴 시간을 얻은 것이었다. 에릭의 전화는 암호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고 그 암호를 모르는 사람들과는 통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에릭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이 그의 평가는 다시 이루어져 "돌아와주길, 클랩튼",

"에릭 - 록큰롤의 조용한 신", "클랩튼의 'Layla' - 세상의 무시를 받은 역사적 앨범의 비극" 등의

회고록이 출간되었고 레코드사로부터 7장의 앨범이 나왔다. 에릭이 잠적한 사이, 스티비 원더와 공연한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이 말은 두 사람의 라이브 앨범을 제작할 것이라는 매니저 스틱우드의 발언에 힘을 얻어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듯 했으나 결국 결실을 맺지는 못했고 에릭이 스티비 원더의 미발표 앨범 [I'm Free]에

세션을 해주는 선에서 끝이 났다.

 

 

그는 파리에서 열린 더 후 (The Who)의 공연에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출연은 더 후의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셴드의 설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피트는 에릭이 다시 음악에

정열을 품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에릭이 반쯤 완성시켜 놓은 곡을 끝맺을 수 있도록 음악적 아이디어를

주었고 앨리스와 함께 그를 설득해 [젊은이를 위한 팡파르] 행사에 나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행사를 위한

멤버도 직접 섭외했다. 그는 론 우드 (기타), 스티브 윈우드 (건반), 짐 카팔디 (드럼), 릭 그래치 (베이스),

지미 카스테인 (드럼) 등의 뮤지션에 자신과 에릭을 넣어 라인업을 짰고 그래치는 밴드의 이름을

팰퍼테이션즈 (The Palpitations)라고 명명했다. 이 그룹의 연습장면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정말 이들이 한 밴드로 연주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중구난방이었고 일을 벌인 장본인 피트는

속이 상해 바닷물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공연날이 가까워지자 그런대로 틀이 잡혔고

무대에 오른 이후에는 관객들의 혼을 쏙 빼버렸다. 이 밴드의 연주에 감동한 1회 관중들은 자리를 비울

생각을 하지 않았고 이들 덕분에 2회 표를 산 사람들은 입장을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결국은 경찰이

개입해 장내 정리를 하고 한 번 더 보겠다는 욕심으로 위조된 표가 없는지 검사까지 마쳐야 했다.

 

무대의 수퍼 뮤지션들은 에릭을 받쳐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한 연주를 했고 그는 이들에게

마음을 맡긴 채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그는 시종 담담한 자세를 보여줬지만 마지막 곡을 마친 뒤

피트를 얼싸안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에릭은 밴드 멤버들을 가리키며 모두에게 감사한다고 말한 뒤

무대 뒤로 사라졌다.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이 위대한 '기타의 신'은

1973년 Rainbow Concert를 통해 일단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인 더 후의 피트 타운셴드였다.

 

 

다음 날 콘서트 비평란의 제목은

"다행이다, 에릭" 이었다. 이날의 기념할만한 연주는 라이브 앨범 [Eric Clapton's Rainbow Concert]에

담겨 있지만 기술상의 문제로 음질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1973년 Rainbow Concert

 

 

 

-  To Be Continued ......

 

 

 


 

 

 

Layla  라이브 영상 감상하기  

 

 

각각의 제목을 클릭하세요~

 

 

Eric Clapton, Jimmy Page, Jeff Beck & etc  -   Layla  (1983 ARMS live)

 

 

Eric Clapton  -  Layla  (1992 Mtv Unplugged live)

 

 

Eric Clapton  -  Layla  (2001 One More Car Tour)

 

 






인쇄하기  (작성일 : 2008년 03월 04일 (02:39),   조회수 : 5906)

이전글    이번 공연은
다음글    3월 빵 공연 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