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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평화시편들의 감동 글쓴이 : 서정민갑
2000년대로 진입하며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에서는 '평등'과 '평화'의 문제가 주요한 의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크게 보아 김영삼 정부에서부터 민주화운동 세력이 정권을 운영하면서 일반 민주주의 관련 의제가 대체로 해결된데 반해, IMF 경제 신탁통치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의 굴레에서 갈수록 극심해지는 계급적 양극화라는 상황은 ‘평등’의 문제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그리고, 부시 정부의 이라크 침략으로 확산된 국제적 반전 운동의 물결은 노무현 정부의 파병과 맞물려 한국에서도 ‘반전 평화’의 의제를 운동의 주요한 의제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특히, 지난해 이라크에서 벌어진 김선일씨의 사망사건은 우리가 결국 미국과 다를바 없는 이라크 침략전쟁의 당사자라는 것을 인식하게 했고 이는 한미관계와 국제적 평화운동에 대해서도 새로운 대응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준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손병휘의 3집 ‘촛불의 바다’는 바로 이러한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깨달음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음반이다. 미선이 효순이 촛불집회 이후 확산된 반미반전운동 과정에서 박성환, 안치환, 우리나라, 윤민석 등 많은 민중가수들이 반미, 반전, 평화 등에 관련된 곡들을 발표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정규 앨범 전체를 통틀어 반전과 평화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가수 손병휘의 앨범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이전에 백창우가 작업한 ‘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 앨범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한정된 아쉬움이 있다). 이는 가수 손병휘가 미선이 효순이 촛불 집회와 탄핵 반대 촛불 집회, 그리고 반전 촛불집회로 이어진 연속적인 촛불집회의 현장을 꿋꿋이 지켰던 행보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민중가요는 그동안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발전과 조응하며 때로는 운동의 의제를 앞서서 제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운동의 의제를 반영하여 형상화하기도 했던 점을 기억한다면 손병휘의 앨범은 바로 한국 시민사회운동에서 주요 의제가 된 평화운동의 위상을 반영하는 것이며 동시에 손병휘 개인의 체험이 생생하게 담겨진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손병휘의 앨범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먼저 정규 앨범 전체를 아울러 일관되게 평화의 문제를 노래했다는 것에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어떻게 담아냈는가 하는 부분이다. 그동안 다른 민중가수들이 발표한 노래들이 대체로 여러 침략전쟁의 당사자인 미국의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담아냈던데 반해 손병휘의 3집 ‘촛불의 바다’는 평화에 대해 훨씬 폭넓고 근본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그는 먼저 ‘수우족의 기도’와 ‘타고르의 기도’라는 두 기도곡을 통해 앨범의 처음을 열고 끝을 닫으며 평화를 염원하는 이의 정갈한 마음을 보여준다. ‘모든 만물들을 존중하게 하여 주시고, 모든 나뭇잎과 작은 돌틈에 감춰둔 교훈들을 깨닫게 하여’ 달라는 겸허한 자세는 정치적인 의미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평화가 살아숨쉬어야 한다는 성찰을 담은 것으로서 ‘평화’의 담론을 근본적으로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는 한국의 평화운동 세력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평화 철학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담론이 실제적인 음악으로 형상화되었다는데 있다. 한 예술 장르에서 어떠한 메시지가 형상화되는가 하는 것이 예술의 변화를 측정하고 의미를 평가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변별점이라고 볼 때 손병휘의 앨범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민중음악 진영에 평화의 문제가 본격적인 자기 의제가 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가 결코 어색하지 않은 것은 앨범의 다른 곡들이 담고 있는 평화의식의 폭넓은 자유로움 때문이다. 그는 6.25 전쟁으로 한국사를 되짚어 가며 우리 사회 오랜 전쟁의식의 근원을 캐고(남강, 아버지), 체첸과 이라크로 눈길을 돌려(나비, 여자아이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집을 묻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피묻은 민들레꽃, 샤이를 마시며, 시르 야 디즐라) 평화의 문제가 범세계적 과제임을 증명한다. 한국의 진보예술진영에서도 아직 반전과 평화의 문제가 충분히 형상화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 손병휘의 앨범은 문제의식의 깊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앨범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현재 한국 대중음악진영에서 반전평화 문제를 담은 앨범이 거의 나오지 않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손병휘의 앨범이 가지는 가치는 더욱 크다.
그러나, 손병휘의 앨범이 가진 가치는 단순히 평화의 의제를 많이 담았다는데 있지 않다. 3집 ‘촛불의 바다’는 손병휘의 지난 1, 2집과 비교했을 때도 가장 진전된 음악적 질을 보여주는데 주목할 점은 박노해, 신동호, 허수경 등의 시인들이 쓴 완성도 높은 시를 골라낸 안목과 이 시들을 음악적으로 잘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기존 민중가요의 노랫말보다는 훨씬 어렵게 쓰여진 시인들의 시를 빌어 노래를 만들었음에도 그는 시에 담긴 메시지를 정확하게 포착한 작곡으로 노랫말과 멜로디를 훌륭하게 결합시켰다. 그리고, 그 곡들을 절제된 편곡과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담아냄으로써 이번 앨범을 완성도 높은 평화음반임과 동시에 자신의 최고작으로 상재했다.
앨범에서 첫 번째 곡 ‘모든 것, 그리고...’는 집회용 곡으로 손색이 없고, 세 번째 곡 ‘남강’에 담긴 황수철의 슬라이드 기타연주도 뛰어나다. 하지만, 이 앨범의 가장 핵심적인 트랙은 역시 다섯 번째 곡 '나비'에서부터 열 한번째 곡 '촛불의 바다'까지이다. ‘나비’가 담은 존재론적 깨달음은 락으로, ‘여자 아이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집을 묻는다’의 쓸쓸한 응시는 한충완의 소금이 돋보이는 포크로, 고 김선일씨추모곡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의 처연한 분노는 하모니카 간주가 잘 어울리는 포크락으로 담고, ‘피 묻은 민들레 꽃’과 ‘샤이를 마시며’는 기타 반주에 각각 박경숙의 해금과 신지아의 아코디언만으로 담백하게 담아냄으로써 세계의 도저한 비극성은 극대화되었다. 앨범의 전반적인 포크적인 사운드에 변화를 준 ‘스르 야 디즐라’는 손병휘와 오래 호흡을 맞춰온 그룹 프리다칼로의 기타리스트 문건식과 드러머 송기정의 잼 연주가 빛을 발하며 다음 곡 ‘촛불의 바다’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머릿곡 ‘모든 것, 그리고...’의 전주와 같은 테마를 사용함으로써 앨범의 통일성을 이끌어 낸 '촛불의 바다‘는 손병휘의 촛불 시위 경험이 잘 살아난 곡으로서 이전 곡들이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손병휘의 결론적 화답과도 같은 곡이다. 아무리 ’오만한 힘의 제국‘이 세계평화를 유린한다 해도 ’이 여린 반딧불‘과도 같은 촛불이 결국 평화를 지켜낼 것임을 당당한 합창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독특한 아우라가 부족한 손병휘의 보컬이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반전평화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끌어안고 음반을 만들어 내는 뚝심과 그에 걸맞는 노랫말을 골라낸 안목, 그리고 빼어난 작곡력은 가수 손병휘를 민중가요 진영의 새로운 대표주자로 주목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 앨범의 매력은 최소한의 장치만으로 질박하게 음악을 꾸밈으로써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얻어낸 절제의 덕이다. 이 앨범이 이젠 독자적인 유통망을 거의 잃어버린 민중가요 판매의 어려움과, 민중가요 음반을 잘 사지 않는 진보진영의 무관심을 극복하고 살아남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예술과 운동의 양 날개로 날아오르려 하는 젊은 민중가수의 의지를 광화문에 피워올렸던 촛불만큼 소중하게 지켜주었으면 한다.
인쇄하기 ( 작성일 : 2005년 07월 04일 (22:12), 조회수 : 3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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